[설왕설래]
- 책 -
바야흐로 책의 홍수시대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권의 책이 나온다.
비스킷 찍듯이 하룻밤 사이에 후딱 만들어지나 보다.
하기야 어제까지 나온 책,
이전에 읽었던 책들을 짜깁기한다면 하룻밤도 긴 시간이다.
대선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징후는 도처에서 산견된다.
신문 지면 하단에 대선 예비주자들의 책 광고가 심심찮게 난다.
경세의 철학이나 구국의 길을 밝힌다는
선전문구와는 달리 낯뜨거운 자기 자랑으로 도배질돼 있다.
그나마도 자신이 썼다기보다는 타인이 써준 책이기 십상이다.
팔릴 리도 없건만 수천권, 수만권씩 찍는다.
‘광고비도 수월찮을 텐데…’하고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
과거에는 현자들이 책을 썼다.
오늘날에는 부자와 권력자와 수다쟁이와 어리석은 자와 경박한
이들이 책을 더 많이 쓴다.
태반의 책이 읽히지 않고 곧장 쓰레기로 변한다.
앞으로 이런 책 아닌 책에는 쓰레기종량제를 적용해야 한다.
서양철학자였던 고 박홍규 전 서울대교수의 전집 5권이 완간되었다.
그가 타계한 지 13년 만이다.
전집이라지만 본인이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다. 유고도 아니다.
저술을 싫어했던 박 교수는 생전에 최소한의 논문 이외에는
거의 서책을 발간하지 않았다고 한다.
각 대학의 철학과 교수 등으로 재직 중인
고인의 제자들이 박 교수 강의 녹음을 풀고 기억을 더듬어 책을 냈다고 한다.
철학을 전공한 이가 아니고서는 읽기에 난해하다. 팔릴 가능성도 작다.
제자들이나 출판사의 우행(?)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대선주자들이 넘쳐나는 정치자금으로 이 책 100권,
아니 10권을 사주는 퍼포먼스를 꿈꾼다.
박 교수는 왜 책을 내지 않았을까?
남의 책 한 권을 읽을 능력도 없는 불학무식인 인사까지
출판기념회를 여는 세상에
또 한 권의 책을 내놓는 것이 민망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종이에 쓰면 글인 줄 알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면
책이 되는 시대에 책 내는 것이 두려워진다.
오죽하면 앙리 베크는 “우리가 쓰는 절반은 유해하고
나머지 절반은 무익하다”고 절규했을까.
“책 읽으니 그곳이 극락정토”라고 한 ‘안득장자언(安得長者言:명말
진계유의 저서)’의 구절에 걸맞은 책이 그리워진다.
조병철 수석논설위원
- 세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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