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청년칼럼]- 태안 바닷가의 부활의식 -

[도정일칼럼]
- 태안 바닷가의 부활의식 -

4계의 자연질서 속에서 해마다 겨울을 맞고
보내는 문명권의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빛의 축제’를 갖고 있다.
낮이 짧아지고 한 해의 가장 긴 밤들이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을 때,
사람들은 마치 그 짧아진 빛의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땅 위에 찬란한 불꽃을 지핀다.
촛불을 켜고, 폭죽을 터트리고, 빛의 궁전을 만든다.
지상을 장악한 어둠의 제국에 맞서는 인간적 항거의 의식, 그것이 빛의 축제다.

-죽음 덮친 해변의 흰 인간띠-
겨울은 인간이 죽음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죽음을 경험할 때의 인간에게
가장 간절히 솟아오르는 것이 부활과 소생에 대한 기대이다.
죽은 것들은 다시 살아날까?
낮은 다시 길어지고 봄은 정말로 다시 올까?
봄이 다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이 나서서 어둠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빛이 돌아올까?
해야 솟아라, 기도하지 않는다면 해는 다시 떠오를까?
겨울철 빛의 축제는 이런 부활기원의 축제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의 촛불 장식과 유대의 하누카 축제까지도
그 민속적 뿌리는 구원과 소생의 기원의식에 닿아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 ‘이산’에 새삼 소개된
조선시대 궁중 연말행사 ‘나례희’도 그런 기원의 축제 가운데 하나다.
신화 속의 ‘죽는 신’들은 반드시 ‘부활하는 신’들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가 그러하고 오시리스가 그렇고, 심지어 나사렛 예수까지도 그러하다.

2007년 말, 겨울의 시작과 함께 한국인을 강타한 죽음의 세력은
태안반도 연안에 밀어닥친 검은 기름띠이다.
십리포,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를 거쳐 파도리에 이르기까지,
대산항에서 군산항까지, 장장 167㎞ 50ha의 바다와 연안 모래밭,
갯벌과 바위들과 사구를 뒤덮은 기름띠는 순식간에
해양 생물들을 목졸라 죽이고 연안 주민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죽음의 공원에 생명들은 부활하고 새들은 다시 찾아올까?
바지락, 낙지, 조개, 굴, 게들은 거기서 다시 숨쉴 수 있을까?
바다와 모래밭을 되살리기 위해 달려온 시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바위와 자갈과 모래의 기름을 닦아내고 있다.
검은 죽음의 세력에 맞서기라도 하려는 듯 그들은 흰색,
노란색의 밝은 빛 방제복들을 입고 있다.
2007년 12월 겨울 한국인은 태안 바닷가에서 소생과 부활의 기원의식을 올리고 있다.

태안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재앙 앞에서 가만 있을 수 없다고 느끼는
동정과 선의의 능력을 가진 시민들이다.
그러나 그 눈물겨운 부활의식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재앙의 뿌리는 거대한 유조선을
바다에 띄우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작동할 수 없는 석유문명 그 자체에 있다.
그 문명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
현대인은 아무도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다.
현대인은 그 문명을 지탱하고 그 문명의 작동방식에 기대어 먹고 산다.
그는 그 문명의 수혜자이며, 그것이 몰고 오는 재앙의 공범자다.
그는 살기 위해 죽음을 초대하고 빛을 만들기 위해
어둠을 불러들여야 하는 역설의 딜레마에 갇혀 있다.

-‘경제만능주의’부터 경계를-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재앙의 직접적 원인 속에 ‘인재(人災)’의 요소가 개입했는지의 여부를 가려내는 일,
사고를 최대한 방지할 대책의 수립 같은 일은 생략될 수 없다.
딜레마와 태만은 서로 다른 문제다.
1989년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를 낸
엑손 석유회사 유조선의 배후에는 ‘술 취한’ 선장이 있었고
2002년 스페인 최악의 유출 사고를 낸 프레스티지호의
침몰 배경에는 낡은 선체의 수리를 거부한 태만이 있다.
생태계 멸시, 생명의 권리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
무자비한 이익추구는 태만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태만이다.
“경제부터 살리자”는 주장은?
경제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소리일 때,
그것은 위험천만의 주장이다.
경제 제일주의는 결코 경제를 위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의 초대이기 때문이다.

〈도정일/문학평론가〉
- 경향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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