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9일 토요일

- [문화 오피니언] 헌법 사라진 국회수첩 -

<시론>
- 헌법 사라진 국회수첩 -

헌법 제54조 2항을 아십니까 -
언제든 어디서든 어느 국회의원에게라도 이렇게 물어본다면 어떤 반응일까.
아는 듯 모르는 듯 웃으면서,
그러나 무슨 시비 아니면 그 비슷한 것이냐는 식의 흰눈이지 않고
주머니나 핸드백 속 국회수첩을 찾는(시늉이라도 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대한민국 국회가 펴낸 ‘국회수첩 2008~2009’를
찾고 뒤져도 제54조 2항이 뭔지 알 도리 없다.

국회의원 임기 한 텀 4년을 되돌려 2004년,
그해 제16대 국회가 3월9일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을 발의,
12일 의결을 거쳤으나 5·14 헌법재판소 기각 이전에 이미 휩쓴 후폭풍을 타고
4·15 총선에서 ‘불발 탄핵의 아들들’이 대거 의정 단상에 오른 제17대의
‘국회수첩 2004’는 그래도 ‘Ⅶ 부록’의 제4번으로 헌법 전문을 싣고 있었다.
다른 수첩도 아닌 국회수첩인데 어떻게 헌법을 ‘부록’에 실을 생각을 했는지,
그것도 1. 역대 국회의원 임기
2. 역대 국회의장·부의장
3. 국회 관련 영문 표기의 뒷자리로 돌려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는 필자가 이따금씩 떠올리는 의문이다).

제18대 새 국회 새 수첩은 그 ‘부록’에서조차 헌법을 들어내고
1. 국회 관련 영문 표기
2. 다이어리(2008~2009)만 실었다.
그러니 헌법 제54조 2항이 무슨 내용인지를 찾아보려면 한참은 더 걸릴 수밖에.
하기야 무슨 내용인지 알고 난 뒤에도 그리 달라질 것 없다.
국회가, 국회의원이 지킨 적이 언제였던가,
있긴 있었던가 싶은 그 조항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회계연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연도 개시 90일 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하여야 한다’
- 헌법 제54조 2항 전문이다.
국회의 차기 회계연도 예산안 의결 시한이 해마다 12월2일인 것도
이 ‘30일 이전 의결’ 명령 때문이다. 올해도 국회는 지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니, 헌법을 지키지 않기로 작심한 지 이미 오래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전체회의를 열어 내년도 예산안과
기금운용계획안 본격 심사에 착수한 것은 지난 19일,
또 그 예결위가 21일까지 종합정책 질의를 벌이고 25~30일 부별 심사한 뒤
12월8일까지 예산안을 처리한다는 일정을 짜고 밝힌 것도 바로 그날 일이다.

12월8일? 여야 합의라던가.
국회는 정기회 회기를 100일 못넘기게 한 헌법 제47조 2항에 따라
9월1일 개회한 정기회가 12월9일 그 100일을 다 채우기 때문에
그 딱 하루 전에 예산안을 처리한다는 말일 테지만 그래도 그렇지,
왜 제47조 2항은 활인검(活人劍)인 듯 받들고
제54조 2항은 살인도(殺人刀)처럼 피해가는가. 민간단체라면 다르다.
헌법이나 법률이 정한 시한을 지키기 바쁜 그 구성원들의 밤이 곧 낮이다.
그런데 국회 구성원들은 죄다 헌법 시한을 지키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국회수첩에 헌법도 뺐겠다, 한두 해 어겨본 것도 아니겠다,
그런 그들이 그럴 듯한 자리마다 이런저런 개혁을 말해오고 있다.
그 개혁 또한 그냥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라는 식 아니던가.
필자는 국회의 예산안 의결이 12월2일을 넘기게 되는 (게 확실해지는) 그날,
김형오 국회의장이 국회를 대표해 국민 앞에 위헌의 죄를 용서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있다.
헌법의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국회 구성원 어느 누구도
밤을 낮 삼지 않았다고도 털어놓기 바란다.
더 있다.
바로 그 잘못을 속죄하는 차원에서 받는 세비를 일할(日割)계산해 자선단체에
그 부분을 (더) 기부하겠다는 의원이 한 사람도 없(으리라)는 점까지.

다 접더라도 세비를 일할 계산하는 의원,
특히 민주당에서 그런 의원이 있다면 정부가 4일 수정제출한
283조8000억원 예산안이 ‘부자 감세(減稅)’라는 그 당의 주장,
그래서 감세를 6조원 철회하게 하고 세출예산 순삭감을 1조원으로 잡은 것까지
얼마만큼은 귀를 기울여보게 할지 모른다. 또 그렇다.
드물 줄이야 잘 알지만 단 1명이라도 있다면 갈수록 태산인
경제위기 걱정에 국회만은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비난도
속사정까지는 잘 알지 못한 험담일 수 있으련만…글쎄.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27일 “예산안을 12월9일까지
처리해야 경제가 살아날 길 열린다”고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12월2일까지다. 나흘 남았다.

[홍정기 /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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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게재 일자 2008-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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